쿠로바 카이토X코이즈미 아카코

*

 

 

 

“후우-.”

 

찬 공기가 매섭다. 털장갑을 낀 손에 입김을 불어넣고 조금씩 움직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버릴지도. 눈도 온다고 해서 별로 춥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차가운 기다림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간도 어느덧 약속했던 시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림이 애석하게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망할 루시퍼 같으니. 그따위로 예언을 해서 날 기다리게 하다니.

 

-다가오는 신의 탄신. 그 붉은 기다림이 하얗게 물들지어다.

 

데이트에 대해서 점괘를 듣겠다며 루시퍼를 불러낸 내가 잘못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 악마, 이전부터 내 선택에 대해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았는걸. …결국, 혼자 들떠서 설레발 친 셈이다.

 

예언만 아니었어도 늘 나오던 대로 정시나 되어 왔을 것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멀거니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와중, 길 멀찍이 황갈색의 익숙한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기억하고 있는 그 얼굴이 맞았다.

 

“사구루 군?”

 

왜 이런 곳에?

 

차분한 톤의 황토색 모직 코트를 걸친 훤칠한 키의 소년.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다 발갛게 물든 볼이 추위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다그치긴가요.”

 

오랜만입니다, 아카코 양. 날카로운 내 태도와는 달리 인사하는 그는 반가움만이 가득했다. 조금 떨떠름했다. 그야 그가 12월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니 오랜만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반가워할 만큼 우리가 친밀한 사이였던가. 애초에 그와 내 사이는 ‘우리’로 엮기에는 모자랄 만큼 애매한 사이였다.

 

“날도 추운데 이런 밖에서 약속을 잡은 겁니까?”

 

낯빛이 좋지 않아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언. 하얗게 물든다고 했지. 하얗다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눈. 내 입장에서는 밤하늘을 수놓는 하얀 괴도, 키드. 그리고,

 

눈앞의 하쿠바(白馬).

 

하아….

 

어쩐지 축 늘어지고 싶어졌다. 그런 심정과는 별개로, 눈을 살짝 감으며 답했다.

 

“그야 성탄 전야니까. 그러는 사구루 군이야말로 이런 날 혼자 무슨 일이야?”

 

“아, 저는.”

 

그는 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안에서 무엇을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의아해하자 그는 기밀이라며 보여드릴 수는 없군요, 하며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 기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약속 시각에 가까워진 지금으로썬 그저 그가 어서 지나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 마주치면 소란이 일터였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하쿠바에게도 말했듯 오늘은 성탄 전야.

 

그토록 기다리던 이브니까….

 

때문에 하쿠바가 자꾸 다가오면서 말을 걸어도 내쫓는 대신 갈 길을 가라며 웃으며 보내려 했다. 기분을 망치기도 싫거니와, 애써 차려입고 나온 이런 날 괜한 일을 벌이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를 피해 조금씩 움직이다가 등에 무언가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읏.”

 

뒤를 돌아보니 유리문과 크리스마스 리스 장식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겹쳐 장식된 작은 나무가 말간 붉은 열매를 달고 있다. 이게 무슨 장식일까, 하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하쿠바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거 아시나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그동안 하쿠바가 계속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는 훨씬 차분하고, 낮았다.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영미권 문화에서 겨우살이는 다산을 상징하지요. 그래서인지 그와 관련된 전통도 남아있답니다.”

 

그가 고요히 눈을 내리깐다. 내리깐 그 시선의 끝에 내 얼굴이 닿아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그의 얼굴 밑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내 눈을 가렸다. 세상이 어두워진다.

 

“…….”

 

입술이 닿은 이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들이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까슬까슬한 입술 주름과 차가운 공기와 맞닿아 싸늘해진 피부의 온도.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에 상용하기 힘든 감정이 솟았다. 차갑지만 뜨거운, 그런 무언가가.

 

그는 이내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갑작스레 들어온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한쪽 손으로 그의 볼 끄트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생글 웃어보였다.

 

“겨우살이 밑의 이성에게 키스를 하는…, 제법 낭만적인 전통이지요.”

 

“화나지 않아?”

 

대뜸 물었다.

 

“뭐가요? 아카코 양이 화낸다면 모르겠지만요.”

 

아, 뺨은 봐주시길. 이런 좋은 날 맞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능청스레 웃어 보이는 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그건 네가 감수해야 하는 문제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니까.

 

“다른 남자가 키스하는 데도 가만히 있었잖아.”

 

“?”

 

의아한 척하는 얼굴에 더 화가 치민다. 손을 뻗어 그가 매만졌던 볼 끝을 잡아 뜯으며 달려들었다.

 

“자, 잠깐. 왓-!”

 

북-하고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내리감았다. 다른 한쪽 팔은 그의 목 뒤에 매달리듯 둘렀다. 목표가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다.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부산스러웠고, 난장판에다가 내가 먼저 달려들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술이니까.

 

코끝으로 따스한 날숨이 느껴졌다. 네 안을 거쳐 온 공기가 이토록 가까웠다. 맞닿은 입술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거웠다. 어쩐지 우스웠다. 아까는 어떻게 참았을까.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참지 않고 흘려보냈다. 그가 투덜거리면서 집중하라며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미 온 힘을 다해 네게 집중하고 있어.

 

너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언제나.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손에 쥔 것을 놓은 채 양손 모두 그의 목 뒤에 둘러 더 강하게 껴안았다.

 

 

*

 

 

 

“따가워~.”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문지르며 카이토가 울상을 지었다. 아카코는 멀찍이 앞서 걷다가 멈춰 섰다.

 

“그러게 누가 엉덩이에 손을 대래?”

 

“그렇지만 분위기가,”

 

“쓰읍.”

 

카이토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빠른 걸음으로 걷던 아카코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질 즈음, 카이토가 물어왔다.

 

“어떻게 안 거야?”

 

“뭘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말고.”

 

“그야.”

 

아카코는 조용히 아까의 기억을 되짚었다. 사실 처음엔 몰랐다. 그런데 분위기를 잡는 그 순간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리깐 그 시선의 간절함. 가라앉았지만 숨겨지지 않는 떨리는 목소리. 거기까지만 해도 그녀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가리는 손 너머로 들리는 그 소리는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 없었다. 그건, 간혹 듣곤 했던 그의 변장이 뜯어지는 소리였으니까.

 

소란스러운 거리였지만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카이토는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지만.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다그치는 그 말에 아카코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구루 군보다 키가 작아서 알았어.”

 

“하아?”

 

카이토는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자기도 제법 많이 컸다며 조만간 하쿠바 정도는 따라잡아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음, 분명 전보다 큰 건 사실이지만 아직 하쿠바는 무리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상관없는데.”

 

“뭐가?”

 

“키가 더 크건 안 크건 내가 좋아하는 건 사구루 군이 아니잖아.”

 

카이토의 사레들린 듯한 기침 소리에 아카코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 눈 가렸을 때, 변장 찢는 소리 들렸고. 그래서 알았어.”

 

변장한 채로 입술 닿으면 들키니까 그랬나? 아카코는 흘리듯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멀어질 때까지 카이토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이유는 아니야.

 

카이토는 그녀의 눈을 가리기 전을 떠올렸다. 가만히 서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 그녀를 보자니 조금 심술이 솟았더랬다. 그래서 겨우살이를 핑계 삼아 당황하게 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키스하고 싶어졌고, 그렇지만 하쿠바 녀석의 얼굴을 한 채로 하기는 싫었다. 어쩌면 처음에 그녀가 했던 말이 맞았던 걸지도 모른다.

 

‘화나지 않아?’

 

‘다른 남자가 키스하는 데도 가만히 있었잖아.’

 

다른 남자로 보일 바에야, 차라리 안 보여주고 말지. 그래서일까. 아카코가 바로 알아봐 주었을 때는 조금 기쁘기까지 했다.

 

“안 오고 뭐 해?”

 

퉁명스러움을 가장한 다정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카이토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하얀 카드 하나를 꺼내 바라보았다.

 

「오늘 밤, 당신 안에서 가장 영롱히 빛나는 그 보석을 훔쳐가겠습니다.」

 

뭐, 아카코에게 휘말려 이건 못 썼지만…. 이만하면 해피엔딩이겠지. 그는 그것을 구겨 다시 안에 넣었다.

 

“간다, 가.”

 

카이토가 속도를 높여 걷기 시작하자 아카코의 걸음이 기다리듯 늦추어진다. 어두운 하늘에 하얗게 떨어지는 빛나는 눈송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

2015 크리스마스 기념 글

'[DCM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케이]K양의 기묘한 하루  (0) 2017.02.15
[카이신]기록하기 위해  (0) 2017.02.15
[하쿠카이]-  (0) 2016.12.25
[하쿠카이]공주님  (0) 2016.12.01
-  (0) 2016.08.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