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카이]-
*
하쿠바는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그의 다급함에 감화된 양 서두르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살폈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 길이 넓어지고 광장이 나타났다. 장식한 시계탑과 트리가 눈에 띄었다. 트리는 화려한 장식들이 눈부셨고, 가장 위쪽에서는 커다란 별이 화려하게 빛났다. 그리고, 불이 모두 꺼졌다.
새하얀 새가 날개를 접듯 펄럭이며 사뿐히 별 위에 내려앉았다. 다시 천천히 들어오는 불빛에 희미하게 몸을 일으키는 이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드러났다. 늦진 않았군.
“자아, 신사 숙녀 여러분. 쇼의 개막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그가 가볍게 트리에서 뛰어내렸다. 하쿠바는 언제나처럼 그가 가볍게 바닥에 내려앉거나 하리라 생각했다.
“!”
경악에 가까운 사람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하쿠바도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의 예상을 완전히 깨트리고 키드는 공중에 서 있었다. 이전에 블루 원더 때와 같은 속임수인가. 하지만 근처에는 어디에도 와이어가 걸릴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주변을 살피는 사이 키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오늘 그가 노린 보석은 그가 처음에 내려앉았던 트리의 가장 큰 별 모양의 토파즈일 터인데. 오히려 점점 멀어져 광장의 중앙 분수대 위에 서고 나서야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딱-, 하고 두 손가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하얗기만 하던 키드의 복장이 붉게 물들었다. 모자부터 망토 끝자락까지 붉게 물든 키드는 마치….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마치, 산타 같았다.
아니, 산타라고?
키드는 전혀 장난치는 느낌이 아니었다. 물론 평소에도 진중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평소의 키드와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는 이제 숫제 망토를 휘날리며 어디선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선물을 꺼내어 광장 아래의 사람들에게 뿌리고 있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런 키드를 이상하게 여기기는커녕 즐겁게 선물을 받아들고는 행복해했다. 문득 하쿠바는 자신의 위로 큰 그림자가 졌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발을 뗐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렸다.
“안녕, 탐정 군. 좋은 밤이지?”
“전혀 안녕하지 못합니다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키드의 목소리에 하쿠바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키드는 순순히 일어났다. 돌아본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도 얼굴을 드러내는군, 괴도 키드. 다시 한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하는 짓입니까?”“무엇이?”
“그야 전부. 보석을 훔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그 웃기지도 않는 차림새는 뭡니까?”
“뭐야, 역시 이런 산타 복장은 취향이 아니야?”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키드가 모자의 둥근 테를 슥 훑어 토끼 귀를 꺼내 세웠다.
“짜잔~.”
“맙소사.”
“이것도 아니라면, 미니스커트 쪽인가?”
짠. 빨갛게 변했던 정장 바지가 짤막한 치마로 변해있었다. 하쿠바는 식겁해서 뒤로 물러섰다.
“미쳤군요. 제정신이 아니야.”
그가 입을 살짝 삐죽였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모양새에 할 말 있으면 하라고 말하자 외알 안경 너머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그리곤 싱글 웃었다.
“미쳤다면, 아니라 탐정 군 말이야?”
“무슨 소리입니까.”
“그야, 꿈은 현실의 반영이잖아? 그러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하쿠바 사구루, 네 쪽이 제정신이 아닌 쪽이겠지.”
“……!”
하쿠바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광장 너머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는 땅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키드의 선물 아닌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광장의 시민들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거봐, 그렇지?”
“무슨…!”
“왜 이리 재미없게 굴어? 꿈이잖아. 원하는 게 있다면 마저 해보라고.”
완전히 깨어버리기 전에 말이야. 하쿠바는 다급히 키드, 아니 꿈속의 키드의 손목을 붙잡았다. 현실의 그가 아닌 것을 일깨우듯,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게 전부야?”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짓말.”
그가 다가왔다. 다가오는 얼굴에 하쿠바는 굳어버렸다. 진짜가 아니야. 하지만 진짜와 쏙 빼닮은 그 얼굴을 피할 수 없었다. 하쿠바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보네, 탐정 군은.”
목소리가 멀어졌다. 눈을 뜨자, 그가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평소의 새하얀 차림새로 돌아와 있었다. 하쿠바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는 키득거리며 잠시 웃었다.
“아쉽네, 이제 안녕이라.”
좀 더 골려주고 싶었는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자, 그럼 안녕이야.”
“잠깐만.”
“에이, 그럴 시간 없네요.”
이젠 그도 발끝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하쿠바 쪽을 돌아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쿠바.”
그리곤 그는 손가락 사이를 벌려 동그란 구체를 꺼냈다. 이런 것까지 진짜 키드와 같을 필요는 없잖아. 하쿠바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곧 구체가 바닥에 닿고, 강렬한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는 알람시계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30분. 날짜는 12월 24일. 꿈은 그러했으나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냥 꿈일진대 이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이브니까, 학교는 가야겠지.
사실 쿠로바 군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해괴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나온 대상 내지는 주인공이 그라니. 하쿠바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쉽게도 있지도 않은 일이나 의뢰를 핑계로 학교를 결석할 성격이 못되었다. 별수 있나, 가는 수밖에.
*
[하쿠카이]크리스마스의 악몽
후편은 마리님의 블로그로 이어집니다. http://blog.naver.com/humab/220920942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