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MK]

[하쿠카이]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Pialle 2017. 2. 15. 23:22

 

*

 

 

눈을 떴는데도 온통 어두웠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찰그락, 하는 맑은 쇳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동시에 발목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져 손을 뻗어 더듬었다. 둥글고 완전히 밀착되어 있는 가죽 띠.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사슬이 만져졌다. 쇳소리는 이것 때문인가.

 

“…….”

 

외부와 단절된 공간과 그 안에 묶여있는 사람이라. 납치당한 것을 보거나 해결해준 적은 직접 당해본 적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이곳에 가둔 것일까.

 

“콜록.”

 

공기가 탁해 몇 번 기침을 하곤,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오후에는 조퇴를 하고 나와 키드의 암호문을 풀었다. 밤 8시에 예고장대로 키드가 나타나서 쫓았고 그러다 놓쳤다. 놓치고 나서 현장을 마무리 짓고 혼자 길을 돌아오다가 정신이 끊겼다. 하루 종일 별달리 수상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무차별적인 납치인가.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 일이 있기는 했다. 다른 부분도 아닌 키드를 추격할 때에.

 

나는 건물 옥상에 서있었고, 그는 내가 있던 건물보다 살짝 더 높은 건물에 있었다. 그는 나를 등지고 달을 보고 있었다. 보석을 살피는 듯하던 그는 이내 뒤로 보석을 던졌다. 아마 내가 있던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달이 참 아름답지? 탐정 군.

 

-나츠메 소세키(夏目 漱石)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군요.

 

-키킥, 그럴 리가. 나는 작가가 아니라 도둑이라고.

 

하기야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게 달이 아름답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사랑고백 같은 뜻일 리 없긴 했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그는 훌쩍 내게 다가왔다. 보름달을 뒤로한 채였기에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난간 위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알고 있어? 탐정 군의 눈 말이야.

 

-?

 

-처음엔 저급의 루비나 가넷 같은 색이라고 생각했거든?

 

-뭡니까, 그 비유는.

 

불그스레한 빛이 감도는 갈색이다 보니 별별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저런 류의 것은 없었다. 그 정도로 신박하고 기분 상하는 비유였다. 그는 킬킬거리며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쁘게 받아들이진 마.

 

그것과 별개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가 훌쩍 뛰어 내가 있던 건물 쪽으로 넘어왔다.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흔들림 없는 착지였다. 그리곤 내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곧이라도 부서질 꽃잎들처럼.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기다렸다. 그가 손으로 내 턱을 올려 볼을 스윽 만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의 손목을 잡아채기 직전,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는 나를 스치듯 지나쳤다.

 

-그런 보석 안에 사실은 최상급의 레드 다이아몬드보다 진귀한 것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뭐,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잘 된 거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곤 웃어보였다.

 

-……?

 

무슨 소리일까. 그 나름대로의 나를 향한 칭찬일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덧붙인 말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 안의 보석만 가지는 건 관심 없지만…, 어쩔 수 없지.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말한 적 있던가, 탐정 군?

 

-?

 

바람이 불었다. 그의 하얀 망토가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처음엔 분명 찾아서 부수어버리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 죽어도 좋아.

 

…끝의 끝까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남기곤 사라지는 그였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한 송이 장미꽃이 꽂혀있었다. 장미꽃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 장미꽃을 현장의 경찰들에게 차마 넘기지 못하고 들고 돌아갔었지. 그리고,

 

“여어, 잘 잤어?”

 

…키드!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었는데, 어느새 그는 방 안에 서 있었다. 분명 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약간이지만 그의 하얀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자리는 괜찮았고? 이런 곳에 혼자 둬서 미안해.”

 

다음에는 좀 더 좋은 곳을 찾아줄게. 그가 무어라 계속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 텁텁한 입 안에 공기가 찼다.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뭔가 내게 할 말은 없습니까?”

 

“응? 지금 하고 있잖아.”

 

“그런 것 말고, 이건 엄연히 납치인데요.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

 

그가 탁, 하고 주먹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알았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 같았다. 왜 같았다, 냐고 묻는다면 썩 잘 보이지 않는 상태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미안, 나츠메 소세키냐고 묻길래 알아들은 줄 알았지.”

 

“무엇을요?”

 

그 이름이 지금 나올 이유가 없었다.

 

“좋아한다고.”

 

“…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대화가 맞긴 하는 걸까. 사실 나는 엉터리로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과 대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영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설령 그의 말마따라 좋아한다고 치더라도 납치와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따라가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힙니다만.”

 

“으음, 그럼 천천히 알려줄게.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 지.”

 

“아니 그쪽보다 왜 제가 이런 꼴로 있어야하는지는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 그랬지. 그건 말이야.”

 

내가 탐정 군을 지켜야하기 때문이야. 더더욱 미궁으로 빠지는 답변이었다.

 

“밖은 위험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거든….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함부로 여기서 나가면 안 돼? 그가 내 발목의 족쇄를 쓰다듬으면서 내뱉은 말은 소름끼칠 정도로 상냥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성을 불렀다.

 

“쿠로바.”

 

그의 손길이 멈칫했다.

 

“사랑하는 거라면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이건 올바른 방식이 아니에요.”

 

설득력 없는 정론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기에 그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찍이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와 그를 비추었다.

 

“그런 것 쯤,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제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겁니까?”

 

도둑으로도 모자라 납치범인 당신으로 기억해도 좋은 겁니까? 당신을 끔찍하게 미워하게 될 거에요.

 

“아니….”

 

그건 죽고 싶을 만큼 슬프지만. 그는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을 납치하고, 당당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던 인물이 내기에는 너무도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나는 널 지켜야만 하니까. 그 과정에서 네가 날 미워하게 된다면.”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그는 어린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분명 그 속이 썩어 들어가고 있음을, 보고 있는 나도 알고 있음에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무슨 의도로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정 그가 내게 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아니,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 스치듯 지나간 꽃향기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았기에. 그럼에도 그가 사라지기 직전, 내 발등 위에 내게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닿은 것을 외면했다.

 

 

*

일본 메이지 시대에 ‘I love you.’라는 문장을 나츠메 소세키라는 문호는 교사 시절 ‘달이 아름답군요.’라고 번역하였고, 당대 유명한 문장가인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나, 죽어도 좋아.’라고 번역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