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MK]

[하쿠카이]도망치지 마

Pialle 2017. 2. 15. 23:23

[하쿠카이]도망치지 마

 

*

 

 

-얄궂네요. 쫓고 쫓기는 운명이라는 건.

 

언젠가 웃으며 키드인 내게 네가 건넨 말. 그 말에 코웃음 치던 내가 있었다. 그런데.

 

-괴도 키드, 당신만은 제가 반드시 잡고 말겁니다.

 

우습게도 어느 순간 네가 했던 말이 진실로 실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잡히고 싶지 않지만 혹시라도 내가 잡힌다면 그건 너였으면 좋겠어. 날 잡을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이라고. 그것을 바랐다.

 

-어떤 당신이건 상관없으니까…! 도망치지 말아줘.

 

그래서 어두운 골목에서 키드였던 내게 건넸던 고백을 거절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자신만만하고 재수 없을 정도로 젠체하던 네가, 그리도 절실하게 나를 바랐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너를 원했기에.

 

그러나 그랬던 네가 변했다. 나는 아직도 그 날 내 손목에 걸렸던 차가운 수갑과 그걸 풀어주던 손길을 잊지 못했는데.

 

“코이즈미 아카코에요. 잘 부탁드려요.”

 

이름처럼 붉은 여자가 전학 왔을 때, 네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부터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너는 아카코를 보고 얼굴을 붉혔고, 그 이후로도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시선이 향했다. 그녀가 말을 걸면 기뻐했고, 떠나가면 아쉬워했다.

 

누가 보아도 너는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네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던 내가 보기에도.

 

그럼 나는? 나는 네게 뭐지? 그저 최선을 다해 괴도를 쫓다보니 그 지독한 열정이 애정과 닮아서, 그래서 네가 착각한 걸까? 나는 그게 진짜 네 감정이라고만 생각해서,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안쪽에 너를 간직하게 되어버렸다. 그것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멍청하게도.

 

“뭐야, 이 추운 날에 밖으로 불러내고.”

 

추운 것보다도, 나를 불러낸 것이 아카코라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퉁명스레 말했다. 아카코는 찌푸린 얼굴로 내게 다가와 이리저리 관찰했다.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는지 그녀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남자가 괴도 키드라니. 너, 진짜 키드이긴 한 거야?”

 

아, 지난밤에 있던 난장판의 연장선인가. 내 정체를 밝히는 건 포기한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냐, 하는 표정을 지어내며 웃었다.

 

“하하, 내가 키드일 리가 없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렇지만 내게 반하지 않는 남자는 괴도 키드뿐. 역시 네가 키드인 건 확실해.”

 

하하…, 정말이지 이 여자는 여러 모로 날 불편하게 한다. 내 정체를 의심하질 않나, 그 녀석을 홀려놓지를 않나. 네 덕분에 나도 혼란 그 자체라고. …잠깐.

 

“뭐라고 했어?”

 

“?”

 

“방금, 반하지 않는 남자 어쩌고 했잖아. 무슨 이야기야?”

 

“아아-, 세상 모든 남자는 나의 포로니까. 반하지 않는 건 너, 괴도 키드뿐이야.”

 

전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반 남학생 모두가 그녀에게 홀려서 흐느적거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괴이한 일이었으니까. 그럼, 그도. 아카코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그거 누구든 그러는 거야?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네게 반하는 거냐고!”

 

“예외는 없어.”

 

되돌릴 수도 없고.

 

어떻게 교실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한 건,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거다. 교실에 돌아와서는 하쿠바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아카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심장 부근을 따갑게 만들었다.

 

키드가 예고장을 보내도, 내가 어떤 말을 걸어도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너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너를 포기할 수 없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하쿠바, 그거 봤어? 이번 키드의 예고장, 굉장한 암호문이래!”

 

“언제나 그랬잖아요?”

 

“아니 이번은 다른가봐. 유명한 탐정들을 기용했는데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모양이라. 혹시 너도 봤어?”

 

네가 슬쩍 예고장을 확인하는 모습을 훔쳐본다. 어떤 반응일까. 알아볼 수 있을까.

 

“본 적 없지만…, 어렵군요. 그래도 누군가는 해독하겠지요.”

 

다른 녀석들은 의미 없어. 너도 그렇게 말했잖아. 나만은 네가 잡고 말겠다고. 허탈한 마음에 책상 위에 털썩 엎드렸다.

 

 

*

 

 

옥상에서 확인한 빅쥬얼은 역시 판도라가 아니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달빛을 뒤로하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보석을 돌려주시죠.”

 

“!”

 

“어서.”

 

하쿠바. 네가 왜 여기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오는 너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나를 감추기 위한 가면을 쓴 채로.

 

“그런 식으로 냉정하게구니 섭섭한 걸, 탐정 군? 열정적으로 언제까지나 나만 쫓아올 것처럼 굴더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흐응, 그렇단 말이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속을 날카로운 칼로 크게 흠집을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쓰라리다. 내가 이렇게 상처 받고 있다는 걸 너는 모르겠지. 하기야, 이미 그 붉은 마법에 걸린 너라면 내가 어떤 상처를 받건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오히려 대범하게 다가오니 당황한 건지 그가 멈칫했다. 완전히 다가가니 모자의 챙에 가려 그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되었다. 내게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 그 눈을 보았다가는, 그나마 지어낸 용기마저 사라져버리고 말 테니까.

 

“내 쪽이야 말로, 보석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보석을 네 손에 넘겼다. 머뭇거리는 네 멱살을 끌어 당겨 몸을 숙이게 한다. 당황해서인지 뻣뻣하게 굳은 네 목을 끌어 당겨 안는다. 앞으로 기울어진 네 얼굴을 가까이 한다. 어둠에 잠긴 붉은 눈이 크게 뜨인다. 느껴지는 건, 차가운 바람에 튼 네 입술과 따뜻한 숨결 뿐. 너는 나를 밀어내지도, 달리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붙잡혀 있었다.

 

달칵, 보석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에도 너와 나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날 쫓지 않아도,”

 

괜찮을 리 없지만.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 나를 잡게 되더라도,”

 

괜찮을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어. 그러니.”

 

내가 다가갈 때 도망치지 말아줘. 그리하여, 언제고 내가 다시 너를 잡을 수 있도록.

 

 

*